클라라 로의 1996년작 <떠도는 삶>에서는 수많은 공간과 언어, 억양이 교차한다. 노부부는 홍콩을 떠나 둘째 딸이 사는 호주로 이주했다. 첫째 딸은 오래전에 남편을 따라 독일에서 딸을 낳고 살고 있다. 아들은 호주 영주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캐나다계 여자친구와 함께 홍콩에 남아 있다. 광둥어 억양이 섞인 외국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려 노력하는 동안 홍콩 반환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홍콩 영화계는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홍콩 반환에 대한 불안함과 공포를 다룬 수많은 묵시록적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 불안의 상당 부분은 우리에게 친숙한 홍콩 누아르의 현란한 폭력을 통해 표출되었다. 하지만 1996년은 더 이상 은유에 숨고만 있을 수 없는 때였고, 실제로 홍콩계 호주인인 클라라 로는 이제는 불필요해진 과장이나 은유를 접고 홍콩을 떠났거나 떠나가는 홍콩 사람들의 진짜 경험 그리고 그를 겪으면서도 남아 있는 중국 문화와 광둥어 사용자의 자긍심을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했던 미래의 홍콩을 직접 보고 있는 2022년의 관객에게 이 90년대의 기록은 그때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