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남편을 따라 두 자식을 끌고 미국으로 간 여자. 한예리의 '모니카'를 보며 내가 아는 그 시절의 여자들을 떠올렸다. 여름날 옷장 바닥에 습기 제거제 대신 날짜 지난 달력을 알맞게 접어 넣던 엄마, 로스앤젤레스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없는 살림에 미제 펜이며 코코아가루 따위를 보내 주던 큰이모, 이혼 후 크게 넘어진 집안을 거의 홀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고모… 아무 데서나 뿌리내리고 지천으로 흐드러지는 미나리처럼, 수없이 기대를 배반하는 생 앞에서 끝끝내 강인했던 그들의 얼굴을.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얼굴, 가부장제라는 스테레오타입 안에서 조용히 분투하는 아내, 남편 이전에 자식의 안녕을 도모하는 엄마, 엄마 이전에 누군가의 딸인 여자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는 꿈도, 자의식도 없다. 거기에는 오직 가족을 향한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한예리는 오랫동안 '희생'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온 이 사랑을 과장도 축소도 없이, 온전한 사랑 그 자체로 번역해 낸다. 한국계 가정의 전형적인 이민사를 그린 이 영화가 뜻밖에 모던한 인상을 주는 이유도 거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메라가 모니카의 얼굴을 화면 가득 비출 때마다 지난 세기의 여자들을 향한 응원의 느낌을 받는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강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