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한 연습실에서 연기 수업을 받는 단역 배우 은희는 어느 날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소설가 료헤이와 마주친다. 약도가 그려진 종이 한 장에 기대어 길 찾기에 고군분투 중인 료헤이에게 은희는 길 안내를 도와주겠다며 선의를 베푼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지만 제법 능숙하고 믿음직하게 목적지를 찾아준 은희. 료헤이는 감사의 인사로 커피를 사겠다고 하고, 은희는 남자친구 현오와의 약속을 뒤로하고 그와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은희는 시종일관 변모하는 자신의 욕망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인물로, 한예리는 은희의 그 즉흥성을 배우라는 정체성으로 연결해 은희의 주 무기로 활용하는 데 집중한다. 직업 배우로서 칭찬받는 연기를 하지 못하는 대신 현실에서만큼은 능란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한예리는 진심과 의도를 교묘하게 바꿔치기하며 상대와의 권력관계를 마구 주무를 수 있는 당돌함을 은희에게 부여한다. 이로써 ‘나쁜 여자’ 프레임에 갇힐 뻔했던 은희에 대한 성마른 해석에 찬물을 끼얹는다. 당초 영화 제목이었던 <최악의 여자>에서 <최악의 하루>로 제목이 바뀐 것은 ‘곤경에 처한 여자’ 은희를 다면체로 진화시킨 한예리의 연기가 가진 진취성의 결과 아닐까. [염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