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소녀 명은에게는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여럿 있다.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를 가훈으로 삼는 세속적인 집안 분위기가 싫고, 시장에서 젓갈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가 못내 부끄럽다. 억척스러운 엄마를 가정주부로, 게으른 아빠를 회사원으로 거짓 소개하는 데에는 평범함이라는 기준에 걸맞고 싶은 마음과 저만의 특별함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고루 섞여 있다. 반장으로 선출된 명은은 교실에 ‘비밀우체통’을 설치하면서 마음속에 품은 자그마한 소망을 하나씩 실현하는가 하면,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글짓기 대회에 참가한다. 스스로 질문하며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동안, 명은의 세상에는 야트막한 ‘비밀의 언덕’이 자리 잡는다. 그 무렵 솔직하고 당당한 소녀 혜진이 전학을 오면서, 명은은 또 다른 가능성에 관해 생각한다. 비밀과 거짓을 훌쩍 뛰어넘는 진실의 힘을 곱씹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마냥 외면하기도 어려운 관계를 들여다본다. <비밀의 언덕>은 가족과 학교라는 공동체 안팎에서 고유한 세계를 일구어 가기 시작하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담이자, 재능과 정체성을 고민하는 창작자에 관한 기록이다. 모든 인물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 너그러운 시선 속에서, 주연을 맡은 문승아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