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엔은 늘 분주하다. 아내, 엄마, 수의사, 딸로서 할 일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차있다. 오늘은 병원까지 찾았다. 의사는 도리엔의 왼쪽 가슴에 양성으로 보이는 혹(lump)이 있다며,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아니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은데 그럴 틈이 없다. 도리엔이 이야기를 꺼내기 앞서 다들 먼저 문제를 터뜨리기 때문이다. 티격태격하던 부모는 이혼하겠다고 나서고, 남편은 다른 여자와 계속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아이들 뒤치다꺼리는 도리엔 혼자 도맡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동물 진료도 제대로 못 끝내기 일쑤. 그런데도 도리엔은 주저앉거나 흐느껴 울지 않는다. 엉뚱한 순간, 엉뚱한 누군가에게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긴 하지만. 영화도 그런 도리엔을 닮았다. 도리엔의 상황이 꼬일 때마다 수시로 경쾌한 음악을 흘리고, 장난꾸러기처럼 눈동자를 굴리는 도리엔의 표정을 잡는다. 도리엔의 고통을 영화가 왜 이렇게 바라보는지, 결말에 가면 비로소 알 수 있다. 아무리 큰 문제가 터져도, 지금의 삶이 와장창 무너질 것 같다 해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도리엔은 그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는 왈가닥이니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도, 그리하여 무언가 깨지고 잃고 달라져도 삶은 꽤 살 만하다. 어쩌면 더 살 만해질는지도 모른다. 첫 장편 연출작부터 독특한 코미디 속에 깊이 있는 삶의 드라마를 녹여내는 안케 블론데 감독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다. [장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