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마를린 고리스의 <침묵에 대한 의문>을 연상시키는, 한 여성의 내면에 대한 도발적이면서도 냉담한 탐구.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식의 의미 있는 행동이나 따뜻한 관계와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하층 계급의 여성 크리스틴. 따라서 그녀의 일상은 덧없이 건조한 쳇바퀴를 반복하고 있고, 그녀의 존재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후기 산업사회에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하나의 작은 단위에 불과하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 날부터인가 직장 상사인 패트리샤가 다가오게 되면서, 이제 크리스틴의 삶은 패트리샤를 중심으로 견고한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패트리샤가 점차 자신과 거리를 두게 되자, 이제까지 크리스틴의 내면에 보이지 않게 쌓여 온 분노와 충동들이 ‘살인’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을 통해서 폭발적으로 표출된다.
 전반적으로 차가운 느낌의 파란색 톤으로 촬영된, 종종 묵음 속으로 빠져드는 화면들은 외로움으로 인해 거의 마비되다시피한 크리스틴의 영혼을 냉철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반면 살인이 일어난 후 크리스틴의 삶에 찾아드는 기적적인 변화들은 오히려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묘사됨으로써 그녀의 삶이 얼마나 커다란 결핍과 불안정성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주유신)